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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과 혁명과 국가이성

최종 수정일: 3월 10일

1. 근대 계몽의 두 종류

 

근대의 계몽에는 두 종류가 있다. 17~18세기에 유럽을 휩쓴 초기 계몽은 사상가/철학자(philosophes)와 작가들에 의한 진보적 계몽이었다. 영국의 로크(Locke)와 흄(Hume), 프랑스의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볼테르(Voltaire), 디드로(Diderot), 달랑베르(d’Alembert) 그리고 독일의 레씽(Lessing)과 빌란드(Wieland) 등이 진보적 계몽의 선구자에 해당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들은 보수로 분류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선 진보적 엘리트들이었다. 진보라는 개념은 시대 상황과 평가 기준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은 다양했다. 그럼에도 공통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봉건적 구체제(ancien régime)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식과 교육을 통해서 인간을 무지와 착각 및 종교적 도그마와 미신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런 계몽의 본질은 억압받던 이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계몽은 18세기 중반부터 절대군주가 계몽사상을 통치에 활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군주는 정권에 비판적인 계몽사상을 싫어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달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 근대화가 뒤진 중부 유럽과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는 절대군주에 의한 보수적 계몽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셉(Joseph) 2세 그리고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Gustav) 3세를 당시의 계몽군주라고 부른다.


계몽사상과 절대주의(Absolutism)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은 따져 묻는 것을 싫어한다.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진보적 계몽은 이성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따져 물을 수 있는 자유를 원했다. 따라서 진보적 계몽과 권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적 관점에서 계몽군주라는 말은 자체적으로 모순되고, 왜곡된 개념이다. 그런데 어떻게 계몽군주라는 개념이 회자되고, 계몽군주의 통치철학을 국가이성으로 미화하기까지 했을까?


17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던 사상가 중 한 명인 영국의 존 로크(1632~1704년). 그의 사상은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년)에 반영되었다.
17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던 사상가 중 한 명인 영국의 존 로크(1632~1704년). 그의 사상은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년)에 반영되었다.

2. 17∼18세기의 진보적 계몽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자기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악마로 몰아붙였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무신론자)은 체포되거나 처형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교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 초기의 계몽주의다. 정치와 관련해서는 영국의 사상가 로크가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태어났으며, 정부와 대중 사이에 계약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17세기에 널리 퍼져있던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정부의 궁극적 목표가 개인의 존엄과 행복의 증진이라는 로크와 몽테스키외 그리고 루소 등의 주장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시도들이었다.


초기의 계몽주의는 절대왕정과 종교가 주장한 절대 진리에 도전했으며, 인쇄ㆍ출판 기술의 발달 속에서 비판적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상징인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당시 교회와 정치체제 모두에게 적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을 변화시킬 정치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계몽주의의 선구자들 중 상당수는 권위에 비판적이고 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급격한 체제 변화를 추구하는 대신에 군주를 통해서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17세기는 전쟁을 통한 외부 위협과 내전(Civil War)으로 국가의 생존이 상시적으로 위협받는 시대였다. 따라서 강력한 절대군주제야말로 대내외적으로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최선의 제도라고 생각한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절대군주제를 국가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주권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프랑스 사상가는 보댕(Jean Bodin)이다. 그는 1562년에 발발한 위그노(huguenots) 전쟁(프랑스 신교와 구교의 30년 전쟁)을 목격하고 1576년에 『국가에 대한 6권의 책』(Les six livres de la République)을 썼다. 이 책에서 보댕은 군주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주만이 자연 상태에 만연한 무질서를 극복하고 법질서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역시 참혹한 영국 내전과 국왕 찰스(Charles) Ⅰ세의 처형(1649년)을 본 후 1651년에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썼다. 이 책에서 홉스는 사회계약을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절대군주만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bellum omnia contra omnes)를 종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크와 달리 보댕과 홉스는 진보적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보댕과 홉스를 여기서 언급한 것은 국가 간의 전쟁과 내전이 근대 초기의 국가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과 함께 절대주의(Absolutism)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시대적 분위기를 전하기 위함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초기 계몽주의 선구자들은 국가가 국민의 행복도 책임지기를 원했다. 단지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리바이어던(Leviahan) 이상의 존재이기를 원한 것이다.

 

3. 18세기의 보수적 계몽: 계몽군주의 등장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알려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계몽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볼테르 등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과 친분도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또한 제대로 실현은 되지 않았으나, 1763년에 모든 계급의 아동에게 약간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려고도 했다. 1740년에 고문을 폐지했으며, 사형제도도 축소시켰다. 법ㆍ제도를 통일시키고, 재판절차도 보다 투명하게 만드는 등 법치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장치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프리드리히 Ⅱ세에게 계몽군주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조치는 모두 그의 권력 강화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진되었다. 프로이센의 법ㆍ제도는 이론과 실제에 있어 괴리가 많았다.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Alexs de Tocqueville)은 이런 현상을 두고 두 종류의 전혀 다른 생명체로 만들어진 기형적인 괴물이 탄생한 것과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계몽정치를 추진한 것은 그가 진실로 계몽사상을 수용해서가 아니다. 계몽이란 그의 통치를 포장하기 위한 철학적 수단에 불과했다. 프로이센의 관료와 신민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올바른 철학을 가진 통치자 혹은 철인왕(philosopher king)이 진실을 토대로 국민을 각성시키는 것이라면 보수적 계몽이니 진보적 계몽이니 따질 필요도 없고, 비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는 억압적이었고, 계몽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었다. 1806년 당시 장관이었던 폰 슐렌부르그-케너트(von Schulenburg-Kehnert)가 말했듯이 프로이센의 정치교육은 “침묵이 시민의 제1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18세기 계몽군주의 모델이었다. 그는 프로이센을 ‘근대적’ 관료제의 특징을 가진 새로운 절대국가로 만들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18세기 계몽군주의 모델이었다. 그는 프로이센을 ‘근대적’ 관료제의 특징을 가진 새로운 절대국가로 만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이센을 군사 강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약간의 인도주의로 포장된 그의 군국주의는 개인과 시민의 권리를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 군사 문제에 관한한 “어느 누구도 이유를 묻지 말고 명령을 수행하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독단적이었다. 직업군인 출신 장관이었던 폰 슈뢰터(von Schrötter)는 프로이센이 “군대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사령부 및 군수품 창고 역할을 하는 국가를 가진 군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국가를 정교한 톱니바퀴로 작동하는 시계 혹은 기계처럼 운영했다. 그러면서 ‘근대적’ 관료제의 특징을 가진 새로운 절대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결코 과거의 군주보다 약하게 전제정치를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주를 견제해 온 법ㆍ제도와 의회를 무력화시키면서 절대국가로의 길을 열었다.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일으킨 7년 전쟁(1756~1763)으로 프로이센 인구의 10%인 약 40만 명이 희생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마치 그가 국가를 개인이나 왕조의 이해보다 우선시하는 ‘계몽군주’의 모델인 것처럼 미화하면서, 그의 통치철학을 국가이성으로 표현하는 학자들이 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을 국가에 봉사하는 최고위 관리로 말했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그가 과거의 절대군주와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수사적 표현을 과장되게 평가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정치로 가난한 농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농민들은 과거보다 무거운 과세에 시달렸고, 군복무도 더 오래 했다. 반면에 토지귀족 융커(Junker)의 특권은 더 강화되었다. 한 사람의 독단에 의해서 운영되었던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가 1786년에 죽은 지 20년 만에 거의 붕괴직전까지 갔다. 프로이센이 이성과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근대국가였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계몽이 위로부터 아래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프로이센 지도층만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해서 낙후되고 분열된 독일의 제후국가/영방국가들의 거의 모든 계층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선의의 전제정치에게 걸었던 당시의 기대였다. 개혁과 사회적 진보의 일차적 책임이 국가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군주는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미국 혁명(1775∼1783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은 국가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왕실의 이익 혹은 권력의 이성을 국가의 이성과 동일시했던 기존의 생각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1976년에 발생한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 미국의 저항은 독립전쟁인 동시에 건국 혁명이었다. 1763년부터 영국과 미국의 13개 식민지 사이에는 관세 및 세금 징수와 관련해서 갈등이 존재했다. 영국 법에 따르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 징수를 할 수 없었다.(no Tax without representation) 이 논리에 따르면 영국의 신민(臣民)인 식민지 미국 주민들도 영국에 세금을 내기 위해서 본국인과 똑같이 영국 의회에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고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영국이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는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국이 프랑스와의 7년 전쟁(1756~1763)으로 발생한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 미국에 여러 가지 과세 조치를 취했다. 특히 차에 수입과세를 부과하는 1773년의 차 법령(Tea Act)이 문제가 되면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발생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소재 주 하원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선언서(1776년)에 서명하는 13개 식민지의 대표들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소재 주 하원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선언서(1776년)에 서명하는 13개 식민지의 대표들

1773년 12월 16일에 인디언으로 변장한 식민지 미국 주민들이 보스턴 항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에 적재된 18,000 파운드의 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다. 이에 영국이 미국 연안 봉쇄를 단행했다. 그리고 미국이 반발하면서 13개 식민지주가 단합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독립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1783년에 영국이 식민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미합중국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의 시초는 군주에 대한 부르주아의 저항이 아니라, 귀족의 저항이 발단이었다. 루이 16세 통치 시기인 1780년대에 프랑스는 국고 수입의 절반을 빚 갚는데 사용했다. 재정 상태가 파산지경이었다. 프랑스 역시 영국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빚을 졌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한 것도 국가의 부채를 증가시켰다.


루이 16세는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1614년에 마지막으로 소집되었던 삼부회(Estates General; 성직자와 귀족 및 제3신분(부르주아와 농민과 도시노동자 등>으로 구성)를 175년 만에 소집하고 귀족의 면세 특권을 수정하려 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반발했다. 루이 16세는 개혁을 포기하고 귀족과 타협했다.


이번에는 제3신분에 소속된 부르주아 계층이 반발했다. 이들은 왕의 명령에 거역하면서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를 소집하고, 농민을 포함해서 중산층과 하층민의 협조를 구했다. 이들은 프랑스 전체 국민의 96%를 차지했다. 국민의회는 전체 국민의 대변자이자 국민주권의 상징으로 되었다.


프랑스의 극심한 경제 위기 속에서 하층계급의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국민의회는 1789년 8월에 제헌의회(Assemblée constituante)로 바뀌고 8월 26일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다. 인간의 천부적 자유권과 법 앞의 평등을 선포한 이 선언은 구체제의 사망 선고를 의미했다. 이후 1791년 9월 3일에 공표된 프랑스 최초의 성문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선포했다. 국왕이 법에 구속되고, 법을 통해서만 통치하게 하면서 입헌군주로 만든 것이다.


제헌의회는 1792년 9월 21일에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로 바뀌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혁명 와중에 루이 16세는 외국으로 도피해서 도움을 청하려했다. 그러나 붙잡혀서 1793년 1월 21일에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한편, 1791년 8월에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의지가 있음을 선언했다.(필니츠<Pillnitz> 선언) 이에 프랑스가 동요하고 반발했다.


전쟁은 1792년 4월 20일에 발발했다. 프랑스의 혁명 지도부는 프랑스 내부의 반(反)혁명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을 무력화시키고 싶어 한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위기에 몰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급진세력이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한다는 구실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국민공회 내에 설치된 공안위원회를 통해서 1793년 6월부터 1794년 7월까지 실시된 공포정치로 최소 4만 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째, 미국은 유럽과 달리 봉건제를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투쟁 대상으로서의 귀족이 없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들 사이의 신분 차이도 크지 않았다.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 상당수는 중산층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로크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크는 영국의 국왕에 대한 시민의 저항권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 내에서 독립전쟁 당시 로크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1776년 7월 4일에 발표된 미국의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는 로크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과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내용과 정부의 정당한 권력이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독립선언서의 주저자인 제퍼슨(Jefferson)은 로크의 『정부에 대한 두 논문』(Tow Treatises of Government)를 보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헌법에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Dèlesprit des lois)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에는 계몽주의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계몽주의 선구자들은 모두 죽었고, 살아 있을 때도 급진적인 혁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미국의 인권선언(버지니아 주의 Declaraton of Rights, 1776년)과 독립선언서가 프랑스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영향을 미치면서 계몽주의가 프랑스로 역수입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를 싸잡아서 비판했던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이 계몽주의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다.


둘째, 미국 혁명은 식민지를 독립국가로 바꿨다. 프랑스 혁명은 정치체제를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를 거쳐 공화제로 바꿨다. 혁명 주도세력도 달랐다. 미국은 혁명 후 온건파가 주도했으며, 외국으로부터의 침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면에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급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외국군의 침입에 놀란 프랑스 국민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뭉쳤고, 애국주의로 무장한 국민군이 최초로 탄생했다.


프랑스에서 급진세력이 몰락한 후 국민군은 혁명의 유산을 지켰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구원자로 등장했다. 이후 나폴레옹과 그의 조카가 황제가 되어 혁명의 성과가 후퇴했다. 나폴레옹 패망 후 빈(Vienna) 회의(1814~1815년)에서는 구질서의 복원이 공식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과 반(反)혁명의 반복이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프랑스 혁명의 성과(새로운 법전<Codes Napoléon>을 통한 법 앞의 평등과 자유 등)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근대화가 촉진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계몽주의는 미국 혁명에 영향을 미쳤고, 이어서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체의 변화를 촉진했다.


프랑스 절대주의 체제에서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리 시민들이 1789년 7월 14일에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국왕 루이 16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프랑스 절대주의 체제에서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리 시민들이 1789년 7월 14일에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국왕 루이 16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5. 국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국가이성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인권선언과 함께 헌법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들은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취하든 민주적 형태를 취하든 헌법국가로 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절대군주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은 국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지만, 프랑스에서는 국민의 대표기관이 국왕을 처형하면서 통치자가 신의 은총으로 점지된다는 기존의 인식이 무너졌다.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된 국왕의 자리는 민족과 민족의 집단적 의지를 표현하는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국왕이 국가라는 등식은 깨지고, 통치자와 피치자를 포괄하는 추상적 개념으로서 국가와 민족이 등장했다. 또한 헌법을 통한 권력의 비인격화가 추진되면서 헌법 기구가 국가의 핵심 장치로 되었다. 국가의 통치가 헌법에 기초해야 정당성을 얻게 된 것이다. 동시에 국가의 이성과 권력(자)의 이성이 분리되면서 국가라는 비인격체가 행위의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론/원칙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면서 이런 원칙이 점차 현실 속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비록 초기 형태지만 사람에 의한 지배가 법에 의한 지배로 대체되고, 주권자의 개념도 군주에서 민족을 거쳐서 국민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권력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하층계급을 천민으로 인식하고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국가이성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되었다.


근대 초기에는 국가이성이 봉건적 요소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기존의 관습과 법ㆍ제도를 넘어서 통치자의 초법적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러면서 권력투쟁의 수단이자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설령 군주제가 복원되더라도 국왕은 더 이상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또한 법에 의해서 구속되며, 법을 통하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이성이 법의 이성을 존중하게끔 된 것이다.


국가의 정통성도 더 이상 왕실이나 종교로부터 찾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민족의 주권이나 국민의 동의에서 찾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전문성을 보유한 관료들이 늘어나고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왕조의 이익 대신에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며 합리성을 기준으로 국가 업무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국가이성의 바람직한 취지에 맞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기 성찰이 결여된 이성이 국가 간의 경쟁에서 이익 추구에 매몰되며 반이성적 결과를 초래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의 이성과 법의 이성 사이에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한편으로 법의 보편성이 개인의 욕망과 독단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지배를 법의 지배로 바꾸는 것은 합리적이다. 통치자 개인의 판단에 의한 국가 운영보다 법치가 국익을 위해서 낫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법의 이성은 올바른 국가이성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평시의 법ㆍ제도 및 수단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정상국가에서 실패국가로 전락할 수 있는 비상시기에 법의 이성이 제 구실을 못하거나 한계를 보일 때 국가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이성, 즉 국가이성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대두된다. 다음 글에서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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