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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이성: 문제 제기

jungdoi57

이 글은 한국국가전략연구원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국가안보전략> 2023년 9월호에 기고한 칼럼이다.

당시 제목은 <국가의 이성>이었다.

웹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www.krins.or.kr/6546

2025년 초에 제 홈페이지를 개편하면서 원 제목에 <문제 제기>라는 용어를 추가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에게 점령되고 분단되어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했다. 1949년에 서독 건국 후 초대 총리가 된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친서방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갓 태어난 서독의 우군을 확보하고, 정치적•경제적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점진적으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좌파 사민당(SPD)은 우파 아데나워 총리의 친서방정책이 소련의 반발로 통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서독의 국익을 서방세계에 팔아넘겼다는 비판도 했다. 그런데 서독 국민은 비현실적인 통일보다 가시적 성과를 가져오는 아데나워 총리의 정책을 지지했다. 이것은 1957년 선거에서 우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그에서 개최된 전당대회에서 변화를 선택했다. 1961년에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한 것도 사민당의 외교안보노선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사민당은 중도로 움직이면서 우파의 친서방정책과 나토정책을 받아들였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도 아데나워 총리의 성과를 인정했다. 다만, 아데나워 시대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그것이 브란트가 생각한 좌파의 새로운 길이었다.


한편, 1962년 쿠바 위기 이후 미국과 소련은 군사적 긴장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서독의 사민당은 긴장완화(데탕트)의 시대적 흐름에 적극 편승했다. 그리고 건국 후 20년 만인 1969년에 처음으로 집권당이 되었다. 브란트는 총리가 되어 친서방정책과 함께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을 추진했다. 그러자 야당이 된 기민련(CDU)/기사련(CSU)은 사민당/자민당(FDP) 연립정부가 서독의 국익을 동유럽사회주의국가들에게 팔아넘겼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서독 국민은 1972년 선거에서 사민당의 손을 들어줬다.


브란트가 1974년에 총리직에서 사퇴했을 때도, 그의 신동방정책은 후임자들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지지를 받았다. 특히 동서독관계의 개선으로 많은 동서독주민들이 오가면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대체 불가능한 정치적 성과였다. 그러자 우파가 중도로 움직였다. 자신의 외교안보정책을 수정하고 사민당의 정책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후 우파는 1982년에 집권당이 되어 전임 좌파 슈미트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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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시민들이 열광하는 모습. 출처: 비즈한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시민들이 열광하는 모습. 출처: 비즈한국

서독의 우파와 좌파는 자신의 노선이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때 과감하게 수정했다. 시대정신을 읽고, 진영논리를 넘어서 정치적 경쟁자의 노선을 받아들였다. 이 같은 국가이성은 외교안보정책에서 정치적 대타협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평화적 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문제는 서독과 한국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소련과 동독은 1960년대 중반에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제안하며 유럽의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반면에 중국과 북한은 소련과 동독의 몰락을 반면교사로 삼고, 국제 및 지역질서의 현상변경을 추구한다. 김정은은 북한이 동독처럼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남북한의 격차가 커질수록 불안해한다. 핵보유국 소련은 핵무기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북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은은 북한이 무너지기 전에 핵무기로 남한을 무너트리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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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북한의 열병식에서 공개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출처: 이코노미 조선
2023년 북한의 열병식에서 공개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출처: 이코노미 조선

한국은 현재 두 개의 전쟁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북한과의 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의 좌우 진영 간 내전이다. 이 내전으로 국가는 불구상태다. 효율적인 북핵 대응도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태평이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안보도 아니다. 국가이성의 부재다.


국가이성은 자기 자신과 외부 환경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한다. 독일 통일 후 30년 간 한국 정부는 좌파든 우파든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독일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했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의 병행 추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 시기는 북한의 본격적인 핵개발 시기와 겹친다. 북한은 동독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한국이 서독과 유사한 정책으로 남북관계가 동서독처럼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데 아직 이런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많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런 희망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제 남북관계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고, 잘못된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영논리를 넘어선 서독의 국가이성을 거울로 삼되, 서독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국가이성을 찾아야 한다.

※ 원고 속 사진은 2024년에 홈페이지를 개설하면서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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