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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이성의 원조, 마키아벨리

jungdoi57

최종 수정일: 1월 18일

국가이성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생존과 작동원리에 대한 통찰력이다. 국익 실현을 위해서 필요한 결단을 내리는 정치적 이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국가이성은 대내외적으로 국가 혹은 국익을 정치적 사고와 행위의 절대적 기준으로 내세운다.  『국가이성에 대한 이념사』(Die Idee der Staatsräson)를 저술한 독일 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는 국가이성을 “국가의 운동법칙(Bewegungsgesetz des Staates)”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국가이성에 대한 논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1513년에 집필한 『군주론』(Il Principe, 1532년에 출간)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 자신은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을 생전에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국가이성의 토대가 되는 정치철학을 제시했을 뿐이다. 마키아벨리 사후에 국가이성(Ragion di Stato)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조반니 보테로(Giovanni Botero)다. 보테로는 1589년에 마키아벨리의 국가와 정치에 대한 철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16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국가이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했던 국가 통치철학의 핵심은 통치자가 국가를 운영하려면 범부와 달리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도 마다하지 말고, 인간애와 인간적인 것 그리고 종교적 가르침도 거스를 수 있어야 한다”(제18장)는 것이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악행과 폭력 사용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것은 기존 중세 시대에 당연시되었던 통치자의 덕목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영국 카톨릭 교회의 추기경 레지널드 폴(Reginald Pole)은 1539년에 인간이 아닌 악마가 인간의 화법을 사용해서 『군주론』을 저술했다는 말을 했다. 마키아벨리를 비난하는 의미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1559년에는 로마 교황청이 『군주론』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왜 후세에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킨 통치철학을 제시했을까?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니콜로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당시에 내부적으로 분열된 이탈리아는 스페인과 프랑스 등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개입으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가장 큰 문제의식은 조국 피렌체의 ‘무기력함’을 극복하면서 독립되고 통일된 강한 이탈리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1498년부터 14년 동안 소데리니 정부의 공화정 체제에서 외교와 국방 담당 관료로 일한 후 메디치가(家)가 1512년에 피렌체에 복귀하면서 축출되었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이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Medici)가(家)를 이용해서 강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라 생각하고 메디치가에 『군주론』을 헌정하며(1516년) 정치 현장에 복귀하고자 노력했다. 한편, 마음 속으로 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는 1513년부터 1519년까지 로마 공화정 체제와 조국 피렌체를 비교하며 『로마사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를 저술하기도 했다. 피렌체에서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공화정의 부활을 기원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제를 옹호하고,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자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정치체제의 형태에 집착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철학을 실현하려고 했던 실천가였다.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였던 그에게 이론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활용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달리 말해서 마키아벨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국가통치의 실천적 지식과 실용적인 행동지침이었다. 이것은 그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키아벨리에게는 종교도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정치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중세 시기에는 종교가 정치의 상위규범이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로마 교황청의 부패한 종교가 이탈리아인과 정치를 타락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치를 종교로부터 분리 및 해방시키고, 정치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강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종교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성과 실용성이었다. 그래서 합리성을 국가 통치의 핵심기준으로 삼았다. 국가의 흥망이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정치를 잘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정치를 종교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기존의 관념을 거꾸로 뒤집어서 종교를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기존의 사상가처럼 과거 아테네와 로마의 역사로 부터 많은 교훈을 도출했다. 그러나 접근방법이 달랐다. 규범적,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접근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냉혹한 투쟁을 정치의 중심에 놓고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면서 국가통치 철학의 일대 전환을 모색했다. 국가가 생존하고 유지되려면 중세에 신학적으로 정립된 규범과 윤리에서 벗어나 국가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독자적 규범과 운동법칙을 찾아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대전환기 르네상스시기에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리고 훗날 국가이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그리고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서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동시에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촉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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