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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초기의 시대정신, 국가이성

jungdoi57

최종 수정일: 1월 29일

중세 말과 근대 초의 전환기적 상황

 

14∼15세기에 유럽은 기근과 질병(흑사병) 및 전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그 결과 과거의 봉건적 위계질서와 공동체에 균열이 생겼다. 이것은 16세기에 시작된 근대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었다. 16∼17세기는 유럽에서 전쟁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시기다. 이 기간 중 일부 정치체제는 생존해서 근대국가로 입지를 다졌으며 일부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아래의 유럽 지도 세 개(<그림 1>과 <그림 2> 그리고 <그림 3>)에서 영토별 경계선 혹은 국경선의 변화를 비교하면 당시 유럽이 얼마나 전쟁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200년 동안 평균적으로 3년 마다 새로운 전쟁이 발생했으며, 전쟁이 없던 기간은 약 10년에 불과했다.

 

 <그림 1> 1490년 당시 유럽

근대 초기의 시대정신, 국가이성

 

전쟁이 유럽을 지배하면서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보편적(universal) 권력은 질서 유지에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고, 정당성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초래한 의식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그림 1>에 보이는 여러 지역의 상이한 법질서와 관습 및 전통은 (신성로마제국 내) 무정부상태와 내전 및 국가/지역 간의 전쟁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개인적 유대관계에 기초한 봉건적 정치공동체 대신에 지역에 기반을 두고 정치권력의 집중과 무력/군사력의 독점 및 중앙집권화를 통해서 안정과 질서를 모색하는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가 대안으로 추구되었다.


동시에 기존의 제도와 관습을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통치이념과 통치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존의 정치공동체를 단지 잘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이념과 수단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서 유래된 국가이성은 합리성을 토대로 새로운 국가와 제도를 건설한다는 전환기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이성은 16∼17세기에 새로운 시대의 통치이념이 되었다.


국가이성은 기존의 법제도가 주는 구속을 타파하는 명분으로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국가의 이익이 통치자의 이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국가의 이성(Reason of State)에서는 국가의 생존이 핵심이고, 권력의 이성(Reason of Power)에서는 권력자의 권력 유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성과 권력의 이성이 다르고, 때론 충돌한다는 점에서 국가이성은 통치자를 구속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국가이성이라는 지침에 따라 국가를 운영할 때 국가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논리는 통치자/권력자도 국가이성의 지상명령에 복종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2> 1648년 유럽 지도

이렇게 해서 권력의 비인격화(Depersonalization of Power)가 제도화될 수 있는 정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특히 국가이성은 군사ㆍ외교 부문에서 귀족의 특권에 제약을 가하는 동시에 이들을 국가의 틀 안에서 관리ㆍ감독하는 것이 필요함을 부각시켰다. 또한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 확충 및 조세 제도와 중앙집권적 법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관료 행정조직의 필요성도 부각시켰다. 그 결과 근대국가 건설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중세 때 개인적 유대관계로 권력자의 측근이 되었던 참모들은 전문 관료들로 대체되었고, 이 관료조직은 전 사회에 통일된 규범을 제시하며 인민 대중을 신민(臣民)화하기 시작했다.


대외정책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때는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과 연대하여 기독교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보다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국가이성의 논리에서는 이것이 가능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특히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인 동시에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리슐리외(Richelieu)는 30년 전쟁 기간(1618∼1648)에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 스웨덴 그리고 독일의 신교도 제후들과 연대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카톨릭 국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직ㆍ간접적 전쟁을 치렀다. 또한 반(反)합스부르크 정책을 위해서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터키를 상대로 군사외교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림 3> 1714년 유럽 지도

국가이성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

 

국가이성은 16세기에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스페인에서 각각 “ragione di stato”, “raison d’état”, “razon de estado”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면서 마치 모든 변화의 시작과 끝인 것처럼 유행했다. 심지어 선술집에서 이발사와 수공업자들이 국가이성을 읊조릴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늦게 17세기 중반 국가이성이 라틴어 “ratio status”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 사후 국가이성 개념에는 – 마키아벨리의 의도와 달리 -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색채가 포함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Botero와 Ammirato, Palazzo, Frachetta, Bonaventura, Zuccolo, Zinano 그리고 Chiaramonti 등 많은 국가이성 이론가들이 마키아벨리의 종교관을 비판하면서 종교와 국가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는 국가이성과 종교를 분리했다. 네덜란드의 사상가인 립시우스(Justus Lipsius: 1547∼1606)는 도덕과 국가이성의 결합을 추구했다. 국가이성에 대한 합의되고 통일된 인식이 존재하지 않은 채, 유럽에서 이 개념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괴테의 조상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Johann Wolfgang Textor)가 ‘Tractatus Juris Publici 라는 글에서 “모든 사람이 국가이성을 말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해서 서로 다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근대 초기에는 국가이성이라는 명분으로 통치자에 위험하거나 체제 보장에 역기능을 하는 사람을 죽여도 좋은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통치자가 이렇게 하는 것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인민 대중을 위한 행동으로 포장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다. 그리하여 국가이성을 비도덕적이고 잘못된 정치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정치의 실패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동시대에 함께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는 국가이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공공선 혹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이성의 관점에서 현행법을 거스르고, 무력화시키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통치자가 당위성 차원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초법적인 정치를 하다 보니 국가이성이 새 시대를 여는 대신에 구체제를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이성에서 권력(자)의 이성으로

 

국가의 이성과 권력(자)의 이성은 다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1638∼1715)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절대왕정을 구축했다. 그가 “짐이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말을 실제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사고방식으로 통치한 군주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행정 결정과 명령도 「국가의 이름」 대신에 「국왕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은 국가가 아닌, 루이 14세였다. 17세기에 만연했던 「왕권신수설」이라는 신화는 이를 뒷받침했다.


유럽에서 절대군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유럽에서 절대군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국가이성의 목표가 실현되면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군주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국가이성은 뒤로 물러나고 권력(자)의 이성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루이 14세는 국가와 인민 대중을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했다. 그는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호화로운 궁중생활과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위해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 이 과정에서 평민, 특히 가난한 농민들의 희생이 컸다. 루이 14세가 1715년에 사망한 후에도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생할 때까지 봉건 잔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무너진 봉건 잔재를 구체제(Ancien Régime)라고 한다.


영국은 17세기 말부터 입헌군주제를 시작하며 프랑스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근대 초기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게 모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근대국가가 건설되면서 봉전적 요소가 청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근대 초기에 재봉건화 현상이 나타났다. 근대에 저항하는 흐름과 이 반근대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계몽주의가 충돌하고, 이성과 반(反)이성이 충돌하면서 근대 유럽의 역사가 전개된 것이다. 다음 글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국가의 이성과 법의 이성>에 대한 글을 두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게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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